讀하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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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 사이가 나쁘다고?!

2021년7월 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 소설 <밝은 밤>이 출간 되었다.
최은영 작가는 2013년 중편 소설 <쇼코의 미소>로 [작가세계]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이후 단편집 <내게 무해한 사람>을 출간했으며 지난 7월 첫 장편 소설 <밝은 밤>을 출간했다. 사람들이 작가 최은영에 대해 생각하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이이야기를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슬픔’, ‘울다’, ‘아프다’라는 단어가 눈에 띄긴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아파 한바탕 눈물을 쏟지만 마음의 위로를 얻은 사람들은 다시 최은영 책을 찾는다.

21년 7월 <밝은 밤>이 출간된 이후 8월, 9월에 작가의 첫 책인 <쇼코의 미소>가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작가와 관련된 연관어로는 ‘할머니’ ‘여성’ ‘엄마’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이는 <밝은 밤>과 관련된 단어들이다.

<밝은 밤>은 증조모(이정선), 할머니(박영옥), 엄마(길미선), 나(이지연)로 이어지는 여성 4대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증조모의 우정 이야기가 이 책의 큰 줄기 역할을 하고 있다. 이후 할머니, 엄마,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이한 점은 모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이다. 할머니와 엄마 사이가 좋지 않아 할머니는 손녀인 나의 결혼식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엄마와 나도 사이가 좋지 않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다시는 돌이키지 못하는 사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이다.

흔히 딸이 어른이 되면 엄마와 ‘친구사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2년간의 ‘모녀관계’라는 단어가 ‘질기다’를 대표하는 부정적인 단어로 많이 언급됨을 알 수 있다. ‘질기다’라는 표현은 강화길 작가의 소설 <음복>에 대해 오은교의 해설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사람들이 이 문장을 SNS에 글을 옮기면서 모녀관계를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다.

모녀관계가 틀어지게 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엄마는 ‘내 딸이 나처럼 살지 않기를, 나처럼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안전한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 그러나 딸은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엄마가 요구하는 삶의 태도에 반항하면서 모녀관계가 틀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밝은 밤>에서도 엿 볼 수 있다.

고조모는 백정의 딸로 태어난 증조모(이정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사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자신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말고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상처받지 말라 했다. 하지만 증조모는 그런 식의 생각이 오히려 자신을 더 화나게 할 뿐이라며 자신의 엄마가 알려준 삶의 방식에 저항했다. 자신을 백정의 딸이라고 경멸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체념하지 못했다. ‘늘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녔던’ 증조모였다.

증조모의 딸인 할머니(박영옥)는 6.25전쟁 중에 한 결혼이 중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남편은 딸(길미선)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혼자 본처에게 갔다. 할머니(이영옥)는 혼자서 딸(길미선)을 키우지만 법적으로는 모녀 관계가 아니어서 ‘미선이의 엄마’가 될 수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엄마(길미선)이 바라는 삶은 하나였다. 그저 ‘평범한 삶’.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고, 눈에 띄지 않고, 이야깃거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삶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딸 지연에게 너는 ‘모든 것을 다 가진 행복한 사람’이라며 세상에 맞서지 않는 태도를 요구했다.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지연은 그런 패배감에 젖은 말들을 경멸하고 그런 마음에 물들지 않기 위해 저항했다.

모녀 사이가 틀어지게 된 이유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백정의 딸로서 자란 증조모가 자식인 할머니에게 줄 수밖에 없었던 상처, 자신 앞으로 딸을 호적에 올릴 수 없는 할머니가 엄마에게 줄 수밖에 없었던 상처, 아빠 없는 아이라고 자란 엄마가 나에게 줄 수밖에 없었던 상처. 그 시대에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 여인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체념적인 삶의 태도’로 감싸고 숨길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체념’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분노’를 대표로 하는 부정적인 단어들 중에 ‘저항’, ‘거부하다’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우리가 체념적인 삶에 태도에 저항하고 거부하다 보면 결국 희망을 본다면 너무 비약적인 해석일까.

나(이지연)는 할머니(박영옥)에게 증조모와 자신, 엄마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마가 준 상처가 개인적인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엄마는 딸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희망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엄마(길미선)도 나(이지연)에게 이처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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